
법원이 명의도용으로 체결된 비대면 대출 약정은 효력이 없다고 판결했다. 금융회사가 비대면 대출 과정에서 본인확인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문제였다.
보이스피싱·명의도용 피해가 급증하면서, 금융사가 본인확인 절차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대출금 회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 셈이다.
업계에 따르면, 사건은 지난해 8월에 A씨가 사기범으로부터 '보상금을 주겠다'는 전화를 받고 자신의 운전면허증 사진을 전송한 데서 비롯됐다. 사기범은 이를 이용해 A씨 명의로 한 금융사의 비대면 일반자금대출 2000만원을 신청했고, 금융사는 이를 승인했다.
법원의 판단은 금융사의 본인확인 절차가 핵심이었다. 금융당국이 정한 '비대면 실명확인방안'에 따르면 금융사는 비대면 거래 시 최소 두 가지 이상의 본인확인 절차를 중첩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해당 금융사는 A씨의 기존 계좌에 1원을 입금하는 방식 외에 별다른 본인확인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 특히 운전면허증 사진은 사본을 다시 촬영한 2차 사본이었고, 영상통화나 생체인증 등 추가 확인은 없었다.
재판부는 “신분증 사본 제출은 단순 진위 확인을 넘어, 본인의 '의사에 기반한 제출'인지 확인하는 과정까지 포함돼야 한다”며 “원본이 아닌 2차 사본을 이용한 인증으로는 실명확인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금융회사가 본인확인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출약정은 명의자에게 효력을 미치지 않으며 채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비대면 금융 확대 속에서 실명확인 의무의 중요성을 제기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이 사건은 비대면 거래에서 기계적 확인만으로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금융사들은 비대면 거래에서 다중 인증 수단 등 실질적 본인확인 절차를 강화해야 하는 판례”라고 말했다.
박두호 기자 walnut_park@etnews.com